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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Offenbach

zen5852 2017. 10. 16. 21:52





자크 오펜바흐는 1819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회당의 칸토르이자 카페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아들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목표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원장이던 케루비니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다.

그러자 오펜바흐의 아버지는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케루비니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바로 이 오디션에서 당시 14살이던 오펜바흐는 놀라운 첼로 솜씨로 케루비니를 감동시켰다.


이렇게 어렵게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오펜바흐는 학교의 아카데믹한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다.

 싫증을 느낀 그는 입학 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임시직을 전전하다가 1835년에 파리 오페라 코미크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 후 오펜바흐는 자비를 들여 노르블랭에게 첼로를,

알레비에게 작곡법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다.

이때 알레비는 오펜바흐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은 나중에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는 자신의 전공인 첼로를 위한 곡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가로서 오펜바흐의 최종 목표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학벌도 없는 외국인이

파리 오페라계에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첼리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프랑스는 물론, 멀리 독일과 영국까지 진출했는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그는 작곡을 하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첼로를 연주하는 작곡가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1850년, 평소에 오펜바흐의 재능을 눈여겨본 코미디 프랑세스 극장의 감독이

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위한 노래나 부수음악을 작곡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오페라를 작곡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펜바흐가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를 끌었고,

더불어 극장의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인 오페라 코미크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지 않았다.




                                               자크 오펜바흐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위촉이 오기를 기다리던 오펜바흐는 결국 기대를 접었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살레 라카즈를 빌려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을 열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1855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박람회장 바로 옆에 극장이 있었다.

거리는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덕분에 극장도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오펜바흐는 작곡, 감독, 지휘, 연출까지 일인다역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극장은 객석이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극장이었다.

이를 위해 오펜바흐는 작은 규모의 곡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나중에 부프 파리지앵은 슈아죌 가에 있는 보다 큰 극장으로 옮겨 갔다.

이 극장을 위해 오펜바흐는 24년 동안 21편의 오페라를 썼다.


오펜바흐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화로운 의상과 무대 장치에 마음껏 돈을 썼으며,

관객들은 화려한 눈요기에 환호했다.


1858년 10월, 〈지옥의 오르페(Orphée aux enfers)〉가 무대에 올랐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의상, 2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거대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공연이었다.

그런데 자냉이라는 평론가가 〈르 피가로〉 지에 이 작품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자 오펜바흐와 대본작가가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논쟁으로 〈지옥의 오르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극장은 연일 이 오페라를 보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1860년대는 오펜바흐 최고의 전성기였다.

 1860년에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특별한 배려로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1862년, 오펜바흐는 부프 파리지앵의 음악감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64년부터는 부프 파리지앵보다 규모가 큰 극장을 위해 작품을 썼다.

1864년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ène)〉,

1866년 〈파리의 삶〉,

 1867년 〈제롤스탱 대공비(La Grande―Duchese de Gérolstein)〉,

 1868년 〈페리콜〉 등 그의 대표작이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1870년 프로이센 전쟁이 터지자 오펜바흐는 가족들을 데리고 스페인 남부로 피란을 떠났다.

그전까지 오펜바흐는 나폴레옹 3세의 비호를 받던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제2 제정기의 앵무새'라는 조롱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프로이센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이 약해지자 오펜바흐의 인기도 땅에 떨어졌다.

프랑스 전역에 반독일 정서가 팽배해졌다.


오펜바흐는 프랑스 시민이 되고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지만,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이 공연 금지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그는 여전히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영국 런던 왕립 극장에서는 1870년부터 2년 동안 무려 15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오를 정도였다.


1871년, 전쟁이 끝나자 오펜바흐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를 후원하던 나폴레옹 3세는 실각했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후에도 그는 오페라 작곡가이자 흥행사로 많은 작품을 작곡하고 무대에 올렸다.


1877년, 그전까지 가벼운 오페레타만 쓰던 오펜바흐가 진지한 오페라로 눈을 돌렸다.

 E. T. A. 호프만의 소설에 기초한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Les contes d'Hoffmann)〉가 그것이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1880년 파리에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역작인 〈호프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오펜바흐는 작곡가 이전에 놀라운 실력을 지닌 첼리스트였다.


         오펜바흐는 작곡가 이전에 놀라운 실력을 지닌 첼리스트였다. 



 Jacques Offenbach   Barcarolle , from 'The Tales of Hoffmann' 

https://youtu.be/g7czptgEv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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