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용감한 형제는 많았다.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는 아마도 케네디 형제일 것이다.
케네디 가문의 세 형제는 다른 사람의 방해만 없었다면
모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을 테고,
미국 역사상 대통령을 연이어 배출한 가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진보적이란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활동'이다.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역사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진보주의자들이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보수주의자들은 역사란
유기체 입장에서 보면 사실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지금의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바꾸기 위해 행동한다.
이는 현실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위험하다.
기원전 130년대 로마의 지배 계층 역시 이 물음을 되뇌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라는 진보주의자 때문이었다.
기원전 137년 집정관 만키우스를 따라 스페인 원정길에 올랐던 그라쿠스는
그 과정에서 로마의 병폐를 낱낱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황혼길에 접어든 로마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개혁만이 살길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입후보해 당선되자
곧 토지개혁법 입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라쿠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반대파의 강력한 위협에 직면한 그는 다시 호민관이 되어
이에 대처코자 했다.
그러나 호민관에 연커푸 입후보한 예는 없었다.
그렇지않아도 눈엣가시였던 그라쿠스의 이러한 행동은
반대파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호민관 선출을 위한 민회가 우연히도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카피톨 언덕의
신전에서 열릴 무렵, 그라쿠스 반대파의 선봉이던 스키피오 나사카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선거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무렵 집정관이던 스카이볼라는 이를 거부했고,
선거는 치러져 그라쿠스의 당선이 확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는 반대파로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스키피오는 그의 무리와 함께 몽둥이와 돌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채
회의장으로 진입했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그라쿠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원시적인 방법으로 때려 죽였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러 용감한 아우가 나타났으니
티베리우스의 아우 가이우스 그라쿠스였다.
그의 형의 뜻을 이러받아 로마 부흥에 나설 것과
아울로 형을 죽음오로 몬 자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형의 뒤를 이러 호민관에 선출되었고, 형의 유산으로 시행되던
토지 개혁에 이어 사법 개혁에 나섰다.
그 무렵 각 속주의 총독들에 대한 재판은 원로원 의원이 배심원으로
참여 했는데, 가이우스는 이를 에큍테스라고 불리는
로마의 기사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들은 지주와 사업가 출신이었지만 원로원에는 참여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러자 총독과 유착 관계를 맺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가이우스는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에 떠밀려 그의 형 덕분엥
전례가 있는 호민관 재선에 도전했고,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가이우스는 로마의 번영을 위해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하는데, 늘 합리적인 정책이 말썽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그는 모든 이탈리아인, 즉 라틴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 무렵 이탈리아의 2/3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로마군의
중추적인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언어와 풍습이 비슷한 이들은 로마 귀족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
미래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로마로 편입시켜 시민권을 주고 자치단체화하는 것은
로마의 평화와 재정, 군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제도였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다른 모든 종족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기던
로마 시민들은 갑자기 주의 모든 종족들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이우스는 올바른 정책이 우둔한 시민들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국 그는 모든 로마인한테 배척당했고,
기원전 121년 아벤티누스 언덕에 집결해 있던
가이우스의 세력은 반대파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30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로써 로마의 개혁 운동은 좌절되었고,
시민의 사형에는 신중하던 로마 또한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용감한 형제 정치인의 효시는 끝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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